전시미분사 #1 《당신은 나의 태양》
(이영철 기획, 토탈미술관, 2004)
“전시, 뭘까?”
매해 수많은 전시가 쏟아지고, 기획자를 자처하는 인력이 늘고 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정작 전시를 둘러싼 이야기가 소위 ‘담론’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차원에서 논의가 되고 있는지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조금 비약해서 말해보자면, 근래의 전시는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약 일주일가량 타임라인을 채우는 단발적인 이벤트 혹은 몇 장의 이미지 정도로 전락해 버린 것 같기도 하다. 전시를 다루는 글에서도 전시의 구조와 그 수행적 역학을 분석하기보다는 주제와 개별 작품의 독해에 집중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도 사실이다. 전시미분사[1]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전시 그 자체를 독해의 대상으로 삼아 전시를 경유한 담론의 장을 열고, 나아가 하나의 제재로서 전시의 타래를 통해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경로 만들기를 제안한다.
서구 미술계에서는 명사형으로서의 ‘더 큐레이토리얼(the curatorial)’의 개념이 논의되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부터 전시를 포함한 기획의 실천을 담론화하는 움직임이 등장했으며[2], 최근에는 본격적으로 전시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역사화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런던에 소재한 연구출판기관인 애프터올(Afterall)에서 기획한 『전시 역사(Exhibition Histories)』 시리즈(2013~)[3]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시리즈는 1955년(도쿠멘타 I) 이후 동시대 미술의 변곡점이되었던 전시를 연구함으로써 개별 작가와 작품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미술사 연구 방식이 아닌, 작품이 공공과 만나고 관계 속에서 작품의 맥락화를 시도하는 ‘전시’를 통해 보다 확장된, 즉 전시 속에서 작품이 당대와 맺는 복잡한 관계성을 재고한 상태에서 역사 쓰기의 가능성을 살핀다. 또한 동남아시아 미술계에서도 전시사는 서구 미술사와는 변별된 동시대 지역미술을 연구하는 중요한 요소로 대두되었는데, 2016년 슈테른베르크(Sternberg Press)에서 출판한 『동남아시아 공간의 큐레이토리얼(SouthEastAsia Spaces of the Curatorial)』 역시도 제도의 안팎에서 펼쳐진 기획의 실천을 지역 미술 역사 연구의 중요한 테제로 삼는다. 특히 셍 유진(Seng Yu Jin)이 제안한 개념 “전시 담론(Exhibitionary Discourse)”은 전시를 전후로 하여 생산된 다종다양한 언어 등을 역사 연구의 중요한 제재로서 제안한다.[4] 한편, 2018년 아트선재센터에서 개최된 《큐레이터 토크: 9X0X》와 2019년 4월호 『Art in Culture』의 특집 「1999-2018, Exhibition 136, Keywords 21」 등 역시도 90년대 말 국내에 등장한 큐레이팅의 개념과 함께 담론의 대상으로서 전시를 전제하고 전시와 기획자의 실천을 통해 동시대 한국 미술의 역사를 사유하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동시대 미술에서 전시를 당대의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제도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교차하는 하나의 사건이자 연구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방증한다. 그 배경에는 기존의 미술사와 학계가 현장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판단과 함께 근과거의 활동을 범주화하고 역사로 규정하기보다는 역사적 흐름과 맥락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할 수 있는 담론의 차원에서 과거를 바라보고 이를 통해 꿰어진 서사의 유연성이 동시대 미술에 접근하는 태도로 더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전시미분사는 전시를 기획자와 창작자가 인식한 세계가 특정한 조건(제도, 자본, 이데올로기, 공간 등)과 만나 응축된 사유의 결과로서 당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사건으로 바라본다. 따라서 전시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실천은 당대의 조건과 상황의 뒤엉킨 관계성을 파악하는 일이자, 복잡다단한 매트릭스의 구조 안에서 전시의 좌표를 이해하고 서술하며 다양한 경로를 만들어 내는 일이라 믿는다. 한편, 이와 같은 연구의 실천은 전시를 단순히 과거를 파악하는 장치로 이해하기보다는 과거의 사건으로서의 전시를, 이를 호명해낸 시간이 직조된 조건들과 다시금 포개어서 새로운 관계를 조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전시미분사의 활동은 과거의 전시를 경유하여 지금 여기에서 어떤 질문을 틔어낼 수 있는지, 어떠한 대화와 논의를 발생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포함한다. 전시를 통해 작품이 그 자체의 논의점을 넘어 새로운 맥락에서 소통되듯이, 과거의 전시를 독해하는 일이 다시 새로운 시제를 만나 다른 차원으로 전이될 수 있는 상태를 만들고자 한다.
《당신은 나의 태양: 한국 현대미술 1960-2004》(이하 ‘당신은 나의 태양') 다시 읽기 쓰기 말하기
우연과 필연이 교차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기획자의 인식과 태도가 크게 작용하여 이 전시를 첫 연구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우선 미술사에 기입된 흐름이 아닌 기획자가 제기한 문제의식의 토대 위에 직조된 한국 미술의 서사라는 점에서 이 전시는,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할 독해의 대상이자 역사 연구의 제재로서의 전시에 접근하는 전시미분사의 태도와 닿아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시대를 표지하는 일종의 기표로 작품을 바라보며, 지시된 당대를 증언하고 기억하는 아카이브와 인터뷰 등을 함께 배치한 전시의 구성적인 측면은 전시를 하나의 시대적 좌표로써 좌표의 상하좌우를 살피어 입체적인 성좌를 그려내고자 하는 전시미분사의 연구 방식과 일맥상통한다고 보았다.
아카이빙 실천(act of archiving)으로서의 연구
경험의 부재 속에서 전시가 남긴 파편들을 통해 과거를 사유하는 과정은 어떻게 설계될 수 있는가?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과 불안정한 기억이 공적인 언어, 공동의 기억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경험은 안전한 경로를 제공하는가? 한편, 연구의 구조와 실천이 과도하게 의미를 규정짓고 낭만화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전시에 생기를 불어넣고 복잡하게 할 것인가? 현재의 기억으로 활성화된 연구의 결과는 다시 아카이브의 한 층위로 포함되어 또 다른 경로를 낳을 수 있을까? 이 연구를 이끄는 다양한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구조와 형식이 적합할까?
무수한 질문을 손에 쥔 채, 우선시 되었던 것은 전시와 관련된 기초적인 자료와 말을 수집하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토탈미술관에 전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산된 문서들이 파편적으로 남아있었으며, 그 사이에서 당시 촬영된 인터뷰의 편집본 DVD, 미완의 작품 리스트, 테이블 위에 비치되었던 수많은 자료의 일부 사본 등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거칠게나마 전시의 기본적인 골조를 쌓는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9] 동시에 이영철 기획자를 비롯하여 전시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기획자, 작가, 비평가 등을 만나 당시 전시에 대한 기억을 모으는 작업을 병행하면서 자료와 구술을 상호 참조하며, 사건의 구멍을 채우고자 했다. 이처럼 기초 자료 차원에서 수집된 전시 자료와 관계자들의 언어는 이 연구 프로젝트의 토대를 세우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으나, 그 무게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은 주체의 기억이 갖는 불안정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수집된 자료에 개입할 수 있는 장치로써 일종의 “접근점(access points)”[10]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경험하지 못한 전시에 접근하는 연구진의 시점과 태도는 자연스럽게 벌어진 시차와 거리를 만들어 과거에 복속하지 않고 개입하는 언어이자 접근점이 될 수 있도록 계획했다. 이러한 구조는 웹사이트에 기반을 둔 프로젝트의 속성상 클릭을 통해 주체와 객체, 과거와 현재, 자료와 기억을 이동하며 이들이 교차하고 뒤섞인 상태로 구현되었다. 또한, 위계가 없는 웹사이트의 구조는 새롭게 생성된 자료들이 다음 접근점을 만들어 낼 아카이브의 일부가 될 수 있음을 제안하는 동시에 접속하는 독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수정되고 편집될 수 있음을 내포한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는 결과로서의 연구가 아닌 접근점으로서 후속 연구의 경로를 무한히 열어 두는 장치가 된다. 이와 같은 전시미분사의 일체의 활동을 역사를 서술하고 맥락화하는 일종의 아카이빙의 실천으로 보았으며, 이를 통해 《당신은 나의 태양》에 접근하는 n가지 경로를 제공하고자 했다.
전시를 읽는 n가지 경로
장지한은 이 전시가 이영철 큐레이터의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한" 인식론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11] 한국현대미술의 역사를 인식하는 기획자의 인식론에 주목한 이 글은 나무, 빛, 동굴이라는 언어를 빌려와 전시를 구성했던 주요한 개념과 결정들이 당대 미술계의 담론과 실천의 상호 관계 속에서 비롯했음을 검토해 나간다. 나무는 뿌리, 기둥, 가지라는 층위의 구조를 지킨 채, 그러니까 기존의 역사를 폐기하기보다는 복수의 갈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토대로서 새로운 역사의 생성을 기대하는 기획자의 관점을 비유하며, 간단한 기표로 묶일 수 없는 개별자로서의 창작자와, 미술, 작품의 자율성은 이중적인 의미의 빛으로 언급되고, 동굴은 산란하고 교차하며 빛이 만들어내는 “서로가 공명하는 분위기"로서의 전시를 말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 전시가 서술된 역사 그 자체에 대한 논거보다는 역사가 서술되는 방식, 즉 역사의 연속성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기획의 의도를 실체화했던 전시의 구성과 구조를 파악할 수 있게 돕는다. 한편, 현시원의 글은 “전시는 하나의 제도다”[12]라는 선언과 함께 시작하면서 독립 큐레이터, 개별자로서의 기획자가 전시를 통해 제도를 기입해 가는 실천으로서 《당신은 나의 태양》을 바라본다. 한국 미술에서 제도는 국가와 집단의 소산이 아닌 실상 힘의 방향을 바꿔보려 했던 개별자의 의지를 통해 가능했다고 말하며, 제도의 의미를 독립 큐레이터로서 이영철의 활동을 통해서, 구체적으로는 2004년 사립미술관에서 열린 이 전시를 통해서 따져본다. 그에 따르면, “제도는 ‘보는 방식'을 발생시키는 시공간"이다. 문제의식에서 비롯한 다르게 보는 방식의 제안을 결국 힘의 방향을 바꾸려는 “운동의 방식"을 만들어 내는 행위로서, 충돌과 이접의 시공으로서 토탈미술관에 담은 한국 미술의 45년, 《당신은 나의 태양》은 이영철의 시선을 통해 제안된 우리 미술의 역사이고, 기존에 기입된 서술의 방향을 바꿔보려는 시도로서의 제도가 된다고 말한다. 또한,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영철이 개인, 집단에 묶이지 않는 개별자였기에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마치 이영철이 한국 동시대미술의 역사를 재조직하며, 집단이 아닌 복수의 개별자, 태양들을 호명했듯이.
이렇게 장지한과 현시원은 이영철의 큐레이토리얼 실천 속에서 《당신은 나의 태양》의 좌표점을 탐색하는 동시에 각각 역사와 제도라는 관계를 교차시켜 전시 읽기를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전시는 좌표계에 찍힌 하나의 점이 아니라, 이런 저런 방향으로 당겨지고, 연결되고, 접촉하면서 전시의 맥락을 다차원으로 확보하며, 전시를 단순히 개인의 차원이나 일시적인 공동체의 경험이 아닌 여러 관계와 조건 속에 위치 시켜서 점의 반경을 무한히 늘리거나, 구멍을 뚫어 길을 낸다.
이제 두 편의 글 사이에 놓인 자료를 살펴보자. 2004년에 쓰여진 기획자의 전시 서문과, 전시 전경이나 작품 사진 등의 자료는 당시 전시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을 정도의 정보를 제공한다. 그 사이로 2020년에 생산된 자료들이 삽입되어 있다. 권태현과 김익현이 제작한 〈당신은 나의 태양 - 2020 가이드 투어〉와 〈시간을 접는 말들〉 영상 시리즈는 과거의 사건으로서의 전시 《당신은 나의 태양》과 기억의 관계를 다룬다. 2020년 12월 텅빈 토탈미술관의 전시장을 배경으로 진행된 가이드 투어는 전시를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도슨트가 부재하는 기억을 회고하는 행위를 통해 이중적 의미의 “능동적인 회고(active recollection)”[13]를 추동한다. 도슨트가 묘사하는 기억은 전시를 경험했던 이들의 희미한 기억 속에 자리한 파편들을 인양해내는 행위인 동시에 사료를 통해 동시다발적인 “현재의 기억”을 만드는 “지금의 행위”로서, 공동의 기억을 작동시킨다.[14] 또한 이 투어는 연구 과정에서 수집한 자료와 발화에 기대어 전시를 꽤나 충실히 개괄하는 한편, 전시가 당시에 남긴 질문과 이 프로젝트를 통해 틔어낸 새로운 질문을 끊임없이 교차시키며, 이 투어가 단순히 부재하는 기억을 현재에 재현하는 수단 내지는 이를 통해 과거를 낭만화하려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한다. 두 편의 연작으로 제작된 〈시간을 접는 말들1, 2〉는 과거의 사건을 둘러싼 다중적인 기억을 모으는 시도이자, 서로 다른 시간을 포개어 보는 노력이다. 특히 〈시간을 접는 말들 2〉는 2004년 당시 전시에 다양한 방식으로 관여했던 이들(장지아, 임근준, 최정화)의 기억을 불러낸다. 기억의 불안정성을 전제한 이 영상은 각자의 이해관계와 입장에 따라 전시가 다르게 기억되고 해석되는 양상을 통해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의도적인 충돌과 폭로를 기대한다. 또한 전시가 낳은 시차만큼이나 변화한 이들의 입장은 사건의 해석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포개어진 시간의 조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갱신되고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역사의 속성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이 프로젝트는 전시의 방법론을 적극 차용한 장치를 통해 독자의 사유에 또 한번의 개입을 시도한다. 독자가 웹사이트에 머무는 시간 동안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노랑색 팝업창 〈메아리〉(2020)는 『당신은 나의 태양: 동시대한국미술을 위한 성찰적 노트』에 수록된 인터뷰와 자료에서 발췌한 당시의 목소리이다. 약 서른 개의 문장이 10분에 한번씩 임의적으로 스크린에 떠오른다. 뿌연 상태로 팝업되어 독자의 클릭과 함께 선명해지며 그 목소리를 드러내는 〈메아리〉는 ‘본래 언어’로서 과거로부터 건져낸 당대의 증언이자 목격이고, 어두운 역사의 이행 과정을 온 몸으로 이겨내고 당도한 햇살처럼 지금에 닿는다.
이렇게 수집된 말들과 시차를 두고 조망한 전시의 읽기는 각각 기억의 문제, (미술) 역사를 인식하는 방식, 서술의 문제, 제도와 개인의 관계 등 다양한 경로를 제시하며 지금은 경험할 수 없는 전시에 진입하는 n가지 경로를 열어두는 한편, 그 자체로 자료가 되어 아카이브의 일부가 된다. 서로 다른 시제의 자료와 사유가 교차하고 뒤섞이도록 구성된 전시미분사의 아카이브는 《당신은 나의 태양》이 16년이라는 시차를 뛰어넘어 지속적으로 갱신되고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 논거점을 마련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포개진 질문들
2019년 우연히 이 전시의 단행본을 발견했던 날로 돌아가본다. 이영철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서문을 시작한다. “최근 45년은 한국이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처음으로 세계사의 중심 무대에 진입하면서 동시대성을 획득한 시기였다."[15] 이 문장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그가 동시대성을 수식하며 선택한 “획득"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킨 다음과 같은 질문 때문이었다.
어째서 동시대성은 획득의 대상일까? 아니 더 정확히는, 동시대성은 여전히 획득의 대상일까?
이러한 질문 역시 내가 딛고 있는, 어쩌면 주관적일 수도 혹은 시대의 흐름일지도 모르는, 시간의 맥락에서 기인한다. 당시 나는 지역성과 관련해서 두 전시를 자주 생각하곤 했다. 하나는 2019년 초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최되었던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_1960's~1990's》(2019. 1. 31. ~2019. 5. 6.)이었고, 다른 하나는 반 아베 미술관에서 진행 중이었던 《The Making of Modern Art》(2017. 4. 27. ~2021. 6. 31.)였다. 두 전시 모두 미술관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특정 시기의 서사를 써내려간다는 점과 기존에 서구를 중심으로 기술된 역사에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전자가, 물론 서사에서 호명된 운동을 지칭하는 용어에 대한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서구와 변별된 지역 미술의 서사를 써내려가면서 비교문화적인 방법론을 통해 다중 서사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면, 후자는 서구가 만든 근대의 캐논을 해체하며 동시에 다른 서사가 존재했음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중 근대(multiple modernities)를 상상한다는 부분이 일맥상통한다고 보았다. 이런 개인적인 흐름에서 마주하게된 문장은 위와 같은 질문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물론 서문에 쓰여진 문장을 당대의 맥락에서 살필 경우, 이야기는 달라진다. 2004년의 한국에서는 광주비엔날레와 같이 국제적인 전시와 이벤트 등을 통해 일기 시작한 세계화의 바람을 타고 동시대성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기 시작했을 무렵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동시대 미술을 형성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세계화에 대한 인식이 필수적인 것처럼 대두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는 한편 한국과 같이 서구 미술 제도 바깥의 현장에서는 지역성과 동시대성 간의 어떤 입장을 내세울 것을 요구받기도 했다. 그러니까 세계화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이동 네트워크를 갖추고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상황, 근대적인 식별 체계를 넘어선 새로운 세계, 새로운 존재 의식, 궁극적으로 집단적이지만 개별적으로 특수한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문화적 상태로의 전환을 의미하면서도, 각 지역과 문화 간의 차이에 대한 인식, 즉 지역적 특이성을 다시 주입하고 확산할 수 있는 전술적 개입을 요구하는 모순적인 양상을 낳기도 했다.[16] 이처럼 지역미술을 바라보는 시각은 서구의 근대 개념에 입각해 일정한 굴절을 일으킨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시 동시대 미술을 둘러싼 지역성과 세계화의 관계를 읽는 조건과 맥락이 2019년의 그것과는 큰 차이를 만든 것은 분명하다.
다시 《당신은 나의 태양》으로 돌아와 보자. 이 전시는 ‘동시대성'을 이중적인 방식으로 호명한다. 전지구화의 맥락에서 획득해야 하는 대상인 동시에, 혼종된 시간으로서의 동시대성, 그러니까 세계화 속에서도 지역적 특이성을 갖는 언어이자, 개별자로서의 동시대성을 의미한다. 이 둘은 혼재하고 양립하며 동시대성의 의미를 만든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영철이 동시대성이 세계화 이전에 서구 미술이 유입되는 시점에 이에 대항하여 우리의 언어를 확립하고자 시도했던 개별자들의 실천을 통해 1960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제안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자들의 실천에 주목하는 전시를 통해 “이질적 요소들의 동시 공존"하는 불연속적인 흐름이 곧 한국 동시대 미술을 형성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 ‘동시대성'의 의미 자체와 그에 따른 실천의 논거와 분기점에 질문을 던지며 논쟁을 촉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대성’의 의미를 둘러싼 논의는 지난 십여 년 간 국내외에서 수없이 전개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동시대성은 규명 불가능성에 있음을 확인했다.[17] 그렇다면 질문의 방향을 구체화하여, 기존의 흐름에서 벗어나 동시대 미술의 역사를 재배치하고자 했던 이 전시가 누락한 것은 무엇인지? 전시에 호명된 실천이 여전히도 어둠에서 건져낸 햇살인지? 등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글의 초입에도 언급했듯이 불연속적인 기억의 서사로서 이 전시가 주목하는 것은 서사의 당위나 역사의 진위 그 자체가 아니다. 그보다는 역사에 연속성을 부여하는 표지판을 잠깐 걷어내고, 집단을 벗어난 개별자 그 자체가 만들어 내는 진동하고 산란하는 충돌의 지대를 조망하고 보살피고자(care) 했던 기획자의 문제의식과 태도에 있다.[18]
다시 전시미분사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전시를 미분한다는 것은 결국 집단으로 묶이는 ‘인적 네트워크’와 이미지가 만드는 스펙터클을 쫓는 것이 아니라 당대에 일어나는 실천이 만드는 진동을 미분하듯 세심히 독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영철의 표현을 빌어 낭만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개별자로서의 창작자들이 만드는 햇살에 좀 더 집중해 보자는 것일 테다.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태양》을 통해 전시미분사가 현재에 묻고 싶은 것은, 우리는 얼마나 집단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서술되는 역사의 관성에 저항하고, 이를 재배치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예술을 실천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예술의 실천을 어떻게 보살피고(care) 있는가?
한국현대미술을 다룬 수많은 전시 중에서 《당신은 나의 태양》(2004)은 규모의 측면에서 눈에 띄는 전시는 아니다. 적지 않은 수의 작품과 인터뷰가 갖가지 자료와 함께 전시장을 가득 채웠지만 공간은 협소했고 인력과 준비 기간은 턱없이 부족했다.[1] 기관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역사의 빈틈을 성실하게 메우고자 하는 전시들을 떠올려보면 《당신은 나의 태양》은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전시는 한국현대미술을 전시하는 데 있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전제를 배반하는 동시에 고유한 방식으로 개념적인 공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다른 방식의 독해를 요구한다.
전시에 대한 '다른' 읽기를 요청하는 것은 그만큼 한국현대미술을 역사라는 이름 아래 특정한 공간 안에 배치하는 일이 오래된 관습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요약하자면 가능한 한 합리적인 분류 체계를 작성하고, 개별 작가와 작품의 역사적인 중요도를 판단하여 각자에게 공간을 할당하는 식이다. 이는 미학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는 역사적인 사유에 의심의 여지없이 부과되는 책무이겠지만, 그 대상이 대문자 한국현대미술이라면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집합을 나누고 그 안에 포함될 원소를 결정하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각각의 부분집합의 이름과 크기가 합의되는 방식에 있다. 그 이름은 때로 어딘가로부터 빌려왔기에 부자연스럽거나, 예외를 다루기에는 너무나 헐겁다. 다음과 같은 것들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김미경은 '개념미술'이라는 용어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작가들의 행위와 언어/설치/영상/회화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표명되고 있는 '개념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일은 먼저 (원조) 서구 개념미술의 수많은 개념적 층위들과의 교차 고리와 변별 지점을 더욱 정확히 찾아내는 데서 시작해야만 했다. 그 다음, 나는 이들과 서구 개념미술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봤자, 그 자체는 그다지 생산성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2] 서구로부터 빌려온 이름에 의심을 품은 미술사학자는 두 영토의 언어를 비교해보지만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할 뿐이다. 교차하는 지점은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이름이 한국 작가들의 '개념'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명백히 '물질적인' 실험과 부자연스러운 용어는 끊임없이 서로 미끄러질 뿐이다. 하나만 더 예를 들어보자. 오상길은 1980년대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80년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변화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 서구의 예술가들과 대등하게 동시대적 대응을 모색하려는 젊은 예술가들의 연구와 작업이 가능해졌던 시기이기도 했다. (...) 그러나 이러한 현장의 상황들은 일단의 비평가들에 의해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의 범주 속의 현상으로 진술되었고, 이에 반발하는 작가들의 입장은 결국 미술의 현장과 비평 사이의 깊은 불신의 골을 파게 되었다."[3] 즉, '포스트모더니즘'은 당시 비평가들 사이에서 일정 기간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담론'의 이름이었을 뿐, 작가들의 '작업'의 이름은 아니었던 것이다. 문제는 언젠가 합의된 역사의 이름이 지금까지도 작업의 이름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4] 결국 회화와 조각의 언어를 혁신하던 작가의 시간은 '포스트'라는 접두사와 함께 '역사적인' 시간과 '탈역사적인' 시간이라는 이분법으로 환원된다. 그 사이에서 진동하는 물질의 감각을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은 그리 쉽게 열리지 않는다.
이영철이 《당신은 나의 태양》을 통해 폐기하는 것은 바로 이 역사의 이름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누군가가 시대마다 달아 놓은 "표지판"이다. 그는 물질에 대한 기표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좀 더 정확하게 기억해서 표지판을 고치자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미술의 기억"을 "거부할 권한"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거부'의 대상은 "저장 기억"이지, 역사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이다.[5] 그는 진공 상태의 탈역사적인 공간으로 손쉽게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그는 미술관 바깥을 "비역사의 열려진 세계"라고 말하기도 했다), 역사적인 공간이 무너지지 않을 만큼의 강도로 거부한다. 그는 기억을 거부하고 '단절'을 말하지만, 동시에 '기념'을 원한다.[6]
《당신은 나의 태양》에는 '개념미술'이나 '포스트 모던 미술'과 같은 역사의 표지판은 없지만, 그렇다고 중력의 지배를 벗어나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공간은 아니다. 예를 들어, 지하에서 이강소와 김구림이 공간을 공유하고, 지상에는 박이소와 김범이 나란히 놓인다. 그들이 함께 있어야만 하는 이유를 규정하는 언어는 없지만, 그들은 동일한 힘의 장력 안에 존재한다. 이영철은 전시 공간의 구조를 나무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1층은) 바람이 흔들리는 가지들, 잎사귀 같기도 하다. 지하의 중간층은 나무의 굵은 줄기지만 80년대 민중미술이라는 하나의 축이 아니라 몇 개의 갈래들을 교차시켰다. 지하 맨 아래층은 땅 속 뿌리이다. 그것이 힘찬 느낌을 주길 원했다."[7]
표지판을 대체한 나무는 중심이 부재한 채 그저 수평적으로 연결된 구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위로, 뿌리와 줄기가, 층과 층이 공간을 구획하면서 동시에 연결하는 형태다. 여기에는 역사의 이름들은 없지만, 수많은 '가지들'과 '갈래들'이 존재한다. 이런 구조는 '운동'이나 '양식', '담론'의 이름으로는 연결할 수 없지만, 감각적으로 공명하는 복수의 연결을 가능하게 한다. 이강소 옆에 곽인식이, 더 나아가 문범이 연결되고 김범과 최정화 사이에 김두진과 유승호가 자리한다. 역사라는 이름의 기념비 위에 함께 새겨질 수 없는 사람들이 한국현대미술을 '기념'하기 위한 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통해 연결된다.
중요한 것은 복수의 가지가 굵은 줄기에서, 그 줄기가 '힘찬' 뿌리로부터 지상으로 뻗어간다는 점이다. 《당신은 나의 태양》은 역사를 해체하고 가지와 가지를, 면과 면을 연결하지만 뿌리로부터 잎사귀까지, 지하부터 지상까지, 과거부터 현재까지, 층과 층을 수직으로 쌓아나간다. 전시는 표지판을 거부하지만 그곳에 모인 작가들이 (이름을 쉽게 말할 수 없는) 하나의 집합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마저 부정하지는 않는다. 전시가 폐기하고자 하는 것은 중심 그 자체가 아니라 중심을 규정하는 기표다.
초대된 작가들을 '한국성'이나 '민족성'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하지 않지만, 그들이 같은 중력을 받고 있는 어떤 이름 없는 공동체라는 사실 그 자체만을 지시하면서, 더불어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줄기와 가지를 연결하는 '나무'라는 구조는 문화산업의 은밀한 욕망에 저항한다. 이를테면 '강남 스타일'과 '기생충'을 '단색화'나 '양혜규'와 함께 열거하는 타자의 시선은 미학적인 것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세계를 향해 어떤 상을 투사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8] 하지만 《당신은 나의 태양》은 (분명 존재를 암시하지만) 이름 없는 중심을 구축함으로써 그러한 상상적인 공간을 차단한다.
이영철은 1990년대 초, 1980년대의 민중미술 운동을 회고하면서 어떤 추상적인 명사가 상정하는 공간, 그의 말에 따르면 "원 바깥의 오염되지 않는 공간"이 실증적인 세계를 잠식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태평양을 건너서: 오늘의 한국 미술》(1993)전을 기획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민중이란 개념의 사회과학적 정의 문제는 미술에 있어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이다. 왜냐하면 민중미술이 특수한 현실 상황에 대해 구체적인 문제의식을 포함하고 있지만 미적인 활동이 곧 정치적인 활동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정치적, 비판적 실천이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고 그것의 형식과 의미가 변화하는 역사적 조건과의 관계 속에서 늘 재해석되어야 하는 한, 규정의 문제는 언제든 '현재'의 용어들로 분절되어야 한다."[9]
《당신은 나의 태양》은 사회과학적 개념을 통해 미술가의 주체성을 손쉽게 규정하거나, 또는 사회적인 배경과 미적인 것을 섣불리 연결하지 않는다. 이영철은 미술가를 두고 '개념미술가'나 '민중미술가'라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가 '빛'이라고, "개별자"라고 말한다. "역사는 각 시대마다 표지판을 달아 마법화를 추방하고 무리들로 묶어버리지만 모두는 각양각색의 개별자다. 이들 각자는 햇살이다. 햇살은 동질적이지 않다. 공통의 태양도 없다."[10]
'빛'으로서의 미술가는 역사적인 사유가 종종 간과하는 미술의 '자율성'이라는 문제를 건드린다. 함께 선언문을 작성하며 잡지를 발간하고 기성의 언어와 제도에 맞서 싸우던 동지라고 해도 결국 미술가는 각자 감각적으로 닫힌 물질을 생산한다. 개개의 작품은 어느 누가 역사적인 임무를 부여한다고 해도 자율적으로 존재한다. 전시장 입구에 붙여 놓은 마루야마 겐지의 「산자의 길」에서 말하는 '창작자'는 《당신은 나의 태양》이 '빛'에 빗대어 말한 '개별자'로서의 미술가와 공명한다. "창작자라는 존재는 어떠한 권위에도 굴하지 않고, 어떠한 집단에도 의지하는 법이 없으며, 그렇다고 세상을 등진 사람의 부류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11] 전시는 미술가에 붙어 있던 이름표를 떼어내면서 그들은 다른 무엇도 아닌 개개의 빛이라고, '어떠한' 집단에도 속하지 않는 '개별자'이자 '창작자'라고 말한다. 이영철은 역사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각인된 두 개의 집단인 '단색화'와 '현실과 발언'을 전시에서 제외함으로써 어떤 상징적인 '권위'가 그 찬란한 빛을 가려버릴 위험을 제거하기도 했다.
2006년 이영철이 기획했던 《탈속의 코미디 - 박이소 유작전》(2005) 역시 미술가를 양식이나 담론의 이름으로 호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기념하기 위해 '빛'의 언어를 경유한다. 간혹 미술사의 논리 속에서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12] 혹은 '버내큘러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13] 이해되는 박이소는 이영철에게 "정오의 예술가"다. 그에 따르면 "그의 말과 작품은 정오를 가리키는 시곗바늘처럼 아슬아슬한 모서리를 지나간다. 한낮은 '가장 짧은 그림자'를 만드는 시간이다. 이 그늘은 삶 안에서 삶과 죽음이 모서리에서 만날 때 빚어지는 '미세한 차이', 곧 뉘앙스의 본질이다. 정오의 태양을 안고 살았던 박이소이기에 타들어가는 육신 속에서도 그의 예술은 언제나 깨달음을 향해 있었고," 박이소는 "미세한 차이로서의 그늘"을 만들었다. 이영철은 그가 태양을, 빛을 품고 있었다고, 그리고 그 빛은 가장 예민한 자만이 감각할 수 있는 차이를 품은 그늘을 이 세계에 드리웠다고 말한다.[14]
공통의 태양이 없는 햇살, 혹은 태양을 품은 미술가와 그림자를 드리우는 빛을 다루는 기획자는 그 빛을 소중히 돌보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영철은 하늘에서 지상을 비추는 초월적인 빛뿐만 아니라 그저 자신의 망막을 자극하는 즉물적인 빛, 즉 지상의 물질이 발산하는 빛도 함께 고려한다. 다시 말해 《당신은 나의 태양》은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운 '개별자'이자 창작자'라는 '빛'으로서의 미술가와 그저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빛'으로서의 작품이라는, 일견 상반되는 두 가지 종류의 '빛'을 동시에 사유한다. 전자는 작가의 고유한 창조성에 방점을 찍는 반면에, 후자는 그의 정신이나 의도와는 무관한 ‘물질’에 집중한다. 이때 미술 작품의 자율성이 등을 돌리는 대상은 함께 공부하고 밤새 치열하게 토론하던 친구들뿐만 아니라, 그 물질을 생산한 미술가 본인도 포함한다. 이영철은 공간을 구성하면서 캔버스와 캔버스가, 색과 색이, 미술관의 면과 면이 충돌하는 감각 그 자체에 집중한다. 그 순간에 《당신은 나의 태양》은 물질과 물질을 이리저리 뒤섞는 하나의 놀이가 된다.
이영철은 1998년 《'98 도시와 영상 - 의식주》(1998)전을 기획할 당시 전시공간을 "복잡성(혹은 카오스)의 장"으로 간주하고, "전시공간 내에 복수성, 복잡성, 혼성을 위한 '접속들'을 가능한 한 많이 만들어내 관객들이 다소간의 '혼란'을 체험"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전통적인 회화와 조각 앞에 선 관객이 기대하는 '관조'의 경험을 파괴하기 위해 그가 주목한 것은 회화나 조각과 같은 오래된 매체들로 구성된 집합이 아니라 "'비미술'과의 '상호 교차', 나아가 일상 자체와의 교환 과정"이었다. 회화와 사진, 조각과 사물 사이의 위계를 무너뜨리고 그저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유희에 집중함으로써 기획자가 목표로 했던 것은 오래된 신화를 파괴하는 것, 즉 "모더니즘 미학의 핵심인 작가주의, 내적인 의미, 연속적인 시간관, 자아의 동일성 등을 분쇄"하는 것이었다.[15]
반면에 《당신은 나의 태양》은 '작가주의'를 파괴하기보다, 초월적인 창작자라는 관념을 끊임없이 지연시키거나 자아와는 무관한 사물들의 세계와 팽팽한 긴장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율적인 '작품'으로 채워진 전시장은 시스템의 상징 권력을 목록에서 지우고, 역사가 각자에게 부여한 이름표를 떼어내면서 '개별자'로서의 작가를 위한 공간을 구축하지만, 동시에 작품은 백색의 공간에서 관조를 위한 널찍한 공간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작품들과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복잡성'의 장에 배치된다. 관객은 진부한 '인적' 네트워크로부터 자유롭지만, 관조적 경험을 파괴하는 '감각적' 네트워크에 구속된다.
《당신은 나의 태양》에서 큐레이터는 '개별자'로서의 미술가라는 빛을 빛나게 하면서, 동시에 사물의 빛을 조율해야만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전시가 작가를 주인공으로 하는 '신화'로 기능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곧 역사의 망각으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전시가 다루는 감각의 데이터가 역사의 데이터를 온전히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감각의 불연속적인 네트워크를 전면에 내세웠던 《'98 도시와 영상 - 의식주》가 "주제의 무의미"를 논했다면, 《당신은 나의 태양》은 1960년부터 2004년까지의 한국현대미술을 '기념'하고자 한다. 전자가 과거로부터 등을 돌리면서 전시가 구축하는 "현재형"에 방점을 찍는다면,[16]후자는 역사와 현재 사이의 "활성적 관계"를 만들고자 한다.[17] 앞서 살펴봤듯이 '나무'의 구조는 역사적인 공간이 무너지지 않을 만큼의 강도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영철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역사 그 자체가 아니라 어색하고 엉성하게 구성된 '연속성'이라는 신화였다.
《당신은 나의 태양》은 '빛'을 섬세하게 조율하는 만큼 '어둠'도 조심스럽게 다룬다. 기획자는 사물의 감각이 충돌하는 '복잡성'의 공간 사이사이에 미술인들의 인터뷰를 비롯한 각종 자료를 배치한다. 즉, 전시는 자율성이라는 '빛'과 근대성이라는 '어둠'을 동시에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다. 1970년부터 2002년까지 1인당 국민 총소득을 보여주는 자료는 경제적으로 어두웠던 지난날의 시간을 증언하고, 신학철의 모내기와 관련된 자료는 미적인 것에 대한 국가의 검열이라는 지독한 어둠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인터뷰의 형식으로 기록된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아카데미즘과 아방가르드, 홍대와 서울대 사이의 대립과 같은 역사의 시간을 가감 없이 기록한다. 《당신은 나의 태양》은 역사의 표지판을 폐기하고 많은 것을 덜어내지만, 동시에 헤드폰을 써야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라는 형식으로 많은 것을 숨겨 놓는다. 전시는 불신과 반목으로 가득 찬 역사의 굴곡을 능숙하게 가릴 뿐, 결코 부정하지 않으면서 근대성의 재현과 즉물적인 유희 사이를 가로지른다.
전시를 관통하는 이러한 인식론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것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박이소는 1998년 발표한 작품 무제(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한 어떤 것)에서 나무로 제작된 테이블 형태의 구조물 위에 두 개의 고무용기를 놓았다. 작가는 구조물의 양 끝에 배치된 고무용기의 한쪽에는 콘크리트 더미를 채웠고, 다른 한쪽 용기는 비워 두었다. 더불어 콘크리트의 위쪽 부분에는 제소를 이용해 둥글게 띠를 두르기도 했다. 그는 이 작품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작품은 만들기의 가장 원시적인 방법인 '쌓아올리기'로서 제작된 단순한 물체를 그 중심축으로 하는데, 생활 주변에서 항상 접하는 나무, 콘크리트, 고무용기 등의 평범한 물질을 통해 상반된 의미와 기능의 접점을 이야기한다.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두 고무용기 사이의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의 대조적 관계이지만, 그 이외에 원래의 액체 상태에서 굳어진 콘크리트에 내재한 고체-액체의 관계, 또 콘크리트 표면을 가로지르는 물감 자국에서는 조각과 회화의 애매모호한 관계도 숨어있다."[18]
이 작품에서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아마도 채워진 것과 비워진 것,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사이의 대비일 것이다. 이 대비를 두고 관객은 콘크리트라는 물질에 근대화와 관련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무언가를 쌓는 노력이 결국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상태와 마찬가지라는 식의 비판적인 의미를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박이소가 우리에게 일깨우듯 이 작품은 그런 '뜻'의 세계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작품은 그저 고체와 액체(제소는 매끈하게 콘크리트의 표면에 칠해진 것이 아니라 흘러내리는 형태를 마치 의도적으로 드러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사이의, 혹은 콘크리트로 형상을 빚는 조각적인 것과 제소로 표면을 칠하는 회화적인 것 사이의 관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작품은 근대성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아니면 물질이나 매체에 관한 무엇일 수도 있다.
《당신은 나의 태양》 역시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한 인식론에 기반한다. 전시는 공통의 태양 없는 빛에 관한 것이면서, 사물의 빛에 관한 것이다. 또한 빛에 관한 것이면서 어둠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같은 땅에 뿌리내린 사람들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여러 갈래로 뻗은 가지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영철은 이 전시를 '동굴'에 빗대면서 "서로가 공명하는 분위기"를 말하기도 했다. 여기서 '서로'라는 명사는 죽은 자와 산 자를 구분하는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인간과 사물, 작품과 기록, 층과 층, 면과 면, 안과 밖까지, 모든 것을 관계의 대상으로 포함할 것이다.[19] 나는 그가 2008년 백남준 아트센터를 개관하면서 그곳을 '미술관'이나 '기념관'이 아니라, '코뮌'이라고 선언했던 것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에게 전시는 '나무'이자 '빛'이며, '동굴'이지만, 무엇보다 존재자들을 위한 '집'이다.[20] 《당신은 나의 태양》은 그렇게 어느 기획자가 이곳의 미술을 위해 지은, '서로'가 만나는 아름다운 집이다.
(개인의) 제도로서의 《당신은 나의 태양》 혹은 ‘특성 없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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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플레이는 정치적 행위다. 내러티브든 공간의 구조든, 시간의 순서든, 공간을 역행하든 디스플레이는 ‘보는 방식’을 제안한다.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의 글이 큐레이터로서의 공간 만들기와 태도라는 협의의 의미에서 ‘배치’를 말한다면, 광의의 의미에서의 배치는 날마다 일어나는 ‘행위’다.[1] 그것은 동사(verb)다. 이영철의 전시에서 디스플레이는 병치다. 서로 다른 것들의 맥락을 끊고 들어가면서 발생시키는 힘의 역동은, 그의 오래된 서술에 따르면 ‘엔지니어링’이다.[2] 2008년 백남준 아트센터 개관 전에서 그는 백남준과 1931년 만주(사변)의 이미지가 상호 동시에 발생하도록 옆에 두었다. 몸에 밴 경험으로서의 그의 배치는 ‘전시’를 통해서만 전이 가능한 제도를 보게 한다. 이때의 제도는 ‘보는 방식’을 발생시키는 시공간으로서의 제도이다.[3]
A와 B라는 서로 다른 것들의 배치를 통해 이영철은 한국 미술사/현장과 하랄트 제만의 큐레이팅 행위를 겹쳐 그린다. 전시 안에서 예술 작품을 병치시키며, 길을 만들어 탈주한다. 미술사와 현장의 관계를 물을 수 있는 것은 큐레이터의 특권일까. 제만을 책이 아닌 광주 음식을 먹으며 직접 전시로 만날 수 있는 것은 어떤 외적 자극의 유입(혹은 배움)이었을까.[4] 한국미술사와 작가의 작업이 새로 제작되고 제시되는 전시의 현장, 독립 큐레이터 1세대인 제만과 한국에서의 ‘전시 만들기’라는 개념은 서로 대치되고 반목하면서도 함께 성장한다. 이영철의 큐레이팅은 한 마디로 ‘각성’이다. 이 각성 앞에 큐레이터와 제도, 뒤통수나 ‘앞’통수, 신체와 개념 등, 어떤 단어들을 불러오느냐에 따라 ‘당신은 나의 태양’을 조망하는 스케일이 달라진다.
질문의 방향을 바꿔보자. 힘을 발생시키고 재조직하는 장치로서의 전시는 하나의 제도이다. 그렇다면, 어떤 제도인가? ‘한국에서 전시라는 제도를 만든 것은 국가 권력인가?’라는 질문은 투박하다. 작가 개인, 작가 그룹이 불을 끄고 켜며 전시를 열었고 작업실, 공간, 전시장 밖을 오가는 시도들이 있었다. 전시 자체뿐 아니라 전시의 제도 안팎에 위치한 개인들은 무엇을 만들고 또 보는지도 중요하다. 이영철의 전시 기획에는 분명 힘의 작용이 있다. 한국 현대미술에서의 전시와 현대미술사 그리고 살아있는 작가들과의 관계, 국제 미술의 이슈들에서 그가 만드는 전시는 작용, 반작용한다. 그것은 어디에서 나온 힘인가. 그 힘이 누구의 것이며, 어떤 행위들을 작동시키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현대미술에서 전시라는 미술 제도를 만드는 힘의 주체는 먼저 국가였다. 그리도 도시와 행정 단위였다. 미술관의 건립에 있어서 국가와 정책의 결정이 강력한 원동력이자 실천 기제였던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건립을 비롯해 한국의 예술 제도에서 국가의 작용은 “미술관 만들기”에서부터 세계화의 출현까지 국가 제도와 관련돼 왔다.[5] 1986년 여름 과천에 건립된 국립현대미술관은 ’86 아시안 게임을 눈앞에 두고 결정된 문화체육관광부의 수단으로서, 체육 진흥에 힘썼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미술관을 순방하며 포즈를 잡는 모습이 신문지 상에 출현하는, 일종의 홍보성 이벤트였다. 광주비엔날레는 어떤가. 광주비엔날레 또한 행정과 정치, 예술의 결합체로서 ‘5·18이라는 정치, 사회적 의제를 문화로 상생시키려는 정치적 슬로건’을 거둔 예술 제도였다. ‘큐레이터에게 전례 없는 전권’을 쥐어준 것으로 평가되는 《’98 도시와 영상》 전은 어떤가. 그것은 기혜경의 서술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98 도시와 영상》 전은 도시의 삶을 주관하는 영상의 특징을 서울이라는 도시에서의 삶을 통해 드러내고자 전시의 주제로 ‘의식주’를 선정”했다. (그러나) 기획자 “이영철은 선정된 주제와 관련하여 그것을 부각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습관적인 행위로 만듦으로써 전시가 표방하는 의미를 흐리고자 노력”[6]했다. 이영철의 전시 방식은 “현대미술 전시의 경우, 점차 주제를 중시하지 않는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판단에 근거”한 큐레이터 이영철의 ‘판단’으로 해석되었다.[7]
1998년 당시 이영철은 서울시의 주관과는 또 다른 층위의 형상을 그린다. 그것은 시각언어와 문자언어의 쌍두마차적인 병렬로서 ‘표방하는 의미’를 ‘흐리고자’ 했다는 발언이었다. ‘흐리고자 했다’는 노력 안에는 행정과 기관의 표제와는 또 다른, 작품과 그 작품의 배치로 구성된 전시만의 독자성을 향한 투쟁이 담겨있다. 또 그것은 한국 바깥의 서구 미술 현장에서 이미 첨단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가장 예술적인 행위로서 전시기획이 갖는 ‘동시대적 흐름’을 향한 진취적인 행보였다. 당대의 전시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탐구는 2000년대 초의 이영철에게 중요한 문제의식이자 한국 미술 현장과 근과거의 역사를 엎쳐 들고나가는 ‘탈출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2001년 그가 쓴 글 「오늘날 현대적 미술 전시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Ⅰ - 전시 엔지니어링의 개념적 상상력을 위하여」와 「오늘날 현대적 미술 전시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Ⅱ - 제 4회 광주비엔날레를 보고 난 후의 제언」에서 그의 복잡다단한 견해와 선언을 동시에 볼 수 있다. 단연코 그가 추구하는 것은 “샘플”이 될 것을 거부하는 전시이(었)다. 이영철은 후자의 글에서 “맥락, 정체성, 이데올로기는 근대를 작동시켜온 3개의 뿌리”라고 쓰며 “시각문화 정보 차원에서의 사례 전시를 하고 말았다”라는 비판을 통해, 현대미술 전시가 지향하는 의미 ‘생성’의 방향타를 짚는다. 이 비판은 그가 본 전시들 중 광주비엔날레 하나에 대한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샘플이 되기를 거부하는, 하나의 제도를 겹쳐 그리며 ‘운동의 방식’을 만들어내는 행위로서 그의 전시는 규모와 상관없이 ‘큰’ 행위다.
지금 우리는 《당신은 나의 태양》을 본다. 그것, 하나의 전시는 힘의 방향을 바꾸려는 제스처다. 1960년부터 2004년까지의 시간대에 형성된 한국 미술의 시점을 국가, 제도, 미술 운동이 아닌 개인‘들’로 바꿔보려는 전시가 바로 《당신은 나의 태양》이다. 박가희 큐레이터의 제안으로 발생한 이 ‘전시 읽기/다시 보기’의 시도는 어떤 전시 하나를 눈앞에 올려둔다. 2004년 토탈미술관에서 열린 《당신은 나의 태양: 한국 현대미술 1960~2004》를 육하원칙으로 서술하면 이렇다. 한 문장으로 적어본다. “이영철 큐레이터가 2004년 10월 15일부터 2014년 12월 5일까지 서울 평창동에 위치한 토탈미술관에서 작가 47명이 참여하는 기획전을 열었다.” ‘왜’에 관해서는 추후 논하기로 하자.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나의 태양》으로 걸어 들어가기 전에 주체와 시간에 대해 각각 주목하자.
먼저 시간. 2004년의 시간에는 몇 개의 층위가 흐른다. 첫째, 전시가 열린 토탈미술관의 시간이다. 1984년 한국 최초의 사립미술관으로 등록된 토탈미술관의 관장 노준의와 건축가 문신규는 1977년에 창간한 잡지 『꾸밈』의 발행인이었다.[8] 2004년 문화관광부 복권기금 지원사업의 기금을 받아 진행되었던 전시는 행정 제도의 관점으로는 사립미술관이 전시를 독자적으로 기획할 수 있는 기금에 의해 실현되었다. 또 이때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지 약 2년 후의 일이었다.[9] 이 즈음 텔레비전을 비롯한 대다수 미디어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유사한 태도의 다큐멘터리들을 제작했고 1990년대의 개인, 세계화, 문민정부의 시대 이후 새롭게 출몰한 세대들이 과연 무엇인지 헤아려 보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큐레이터 이영철은 해당 전시를 실행할 동력을 어떻게 확보했을까. 주어를 이영철 큐레이터로 두고 볼 때 ‘당신은 나의 태양’이라는 목소리의 주인공에서 두 개의 축을 발견하게 된다. 태양만이 주요 축이 아니라는 말이다. 당신이 ‘나의 태양’이 될 때 그 ‘당신’을 ‘나의 태양’이라고 부르는 주체는 누구인가. 정확히 말해 이 전시는 ‘태양들’을 다룬다. 그들(작가들)은 이영철 자신이 여러 인터뷰를 통해 밝히듯 ‘두 개의 눈동자’로 비유되고는 한다.[10] 아니 두 개의 눈동자를 빼낸 태양 없는 어둠 속의 각개전투하는 눈앞의 전시로 치환되는 물질들이다. 또 다른 은유들은 잠시 뒤로 하고, 작가 개인을 ‘태양’으로 딱 집어낸 큐레이터 이영철을, 그의 이력을 검토하면서 살펴보자.
2. 전시의 골조와 “인식”[11]
개인 이력과 한국 큐레이터 제도사를 보자. 외부에 공개된 공적인 시점으로부터의 이영철은 미술 제도나 기관이 형성되는 시점에 호출된다. 한 개인의 공개된 이력은 한국 큐레이터의 제도사와 형성 과정의 주요 포인트들을 찍어낸다.[12] 전시 기획자로서 이영철은 1993년 뉴욕 퀸즈 미술관의 《태평양을 건너서》 전, 1997년 제 2회 광주비엔날레 전시기획실장, 2000년 부산현대미술전 예술 감독, 《당신은 나의 태양》 전시 이후에는 2005년 제 1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총감독, 2008년 백남준아트센터 초대 관장을 맡는다. 이 과정에서 이영철의 공개된 여정은 한국 현대 미술의 공적 제도와 더불어서 논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때,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태양》 전을 기획하던 당시의 이영철은 계원대학교 교수였다. 이와 더불어 큐레이터로서는 ‘토탈미술관 디렉터’라는 직함을 사용했다.[13]
2004년에 열린 토탈미술관의 전시를 기획하고 배치하는 큐레이터는 기관의 미션이 아닌 개인의 비전을 사용한다. 기관의 미션이 절차를 통해 공적 타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개인을 적재적소의 기능을 제공하는 전문인으로 제시한다면, 개인의 비전으로서의 전시 기획은 때로 자문자답처럼 보이기도 하는 ‘질문하기’의 형태를 따른다. 이영철은 《당신은 나의 태양》에서 질문을 대답으로 회귀시킴으로써 선언한다. 예술가의 선언문에 대한 연구 못지않게 큐레이터의 선언문 또한 전시기획서와 서문 등을 통해 제시될 수 있다. 물론 선언이 기술되거나 발화된 문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영철에게 ‘당신은 나의 태양’은 하나의 선언문이자 표제이며 물리적으로는 공간 입구에 휘날리는 깃발이 걸려있던 공간이었다. 전시가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민중미술, 1960~70년대 아방가르드 미술, 그리고 1990년대 이후 2004년 시점의 작가들을 한데 불러 모은 이 전시는 그가 표방하고 제작했던 전시 못지않게 전시의 완료시제로서의 도록 속의 기록이 중요하다.
“각 시대의 상황을 좀 더 넓은 조망하에 볼 수 있게 소개되는 작가들의 숫자를 늘려 잡았고 작가마다 페이지 수는 일정하지 않았다. 이 BOOK이 주제 → 개념 → 이미지로 이행하는 공간 배치의 편집 방식이 아니라 이미지 → 이미지로 도약하며 시간 이미지를 산출해내는 편집이 무엇인지 고민스러웠다. 이미 소개된 글들 가운데 몇 개를 선별하여 스캐너로 작업했고, 인쇄될 작품 이미지들이 서로 연결자가 되어 내부에서 진동하고 미술관 전시에서의 여러 장면들이 골조가 되게 했다.” (2005. 1. 22. 이영철)[14]
선언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무엇을’과 ‘어떻게’를 살펴보았다. ‘어떻게’를 좀 더 살필 수 있는 측면은 전시의 형식에 있다. 작가들을 ‘나의 태양’이라고 부르는 전시는 작가의 작품과 작가, 큐레이터, 비평가의 인터뷰를 공간에 초대했다. 도록에 실린 노준의 관장의 소개글에 따르면 누가? 일간지의 아카이브를 찾아다니며 많은 자료들을 수소문했다. 전시장에는 장장 몇 시간에 이르는 인터뷰가 크지 않은 사이즈의 모니터에 상영되었다. 공간 안에서의 역동을 만들어낸 큐레이터 또한 선언을 쓰는 주체가 될 수 있다면, ‘당신은 나의 태양’이라 부르는 주체의 자리가 큐레이터라는 점을 주목해보자.
이영철은 어떤 개인인가? 큐레이터가 ‘어떤 개인’이라는 점은 왜 이영철에게 부각되고, 또 부각될 수 있는가. 그는 유난히 공개할 수 있는 제도적 루트를 따랐는가. 사적인 부, 지위 등에 의해 발생하거나 추동된 전시 기획이 아닌 공적 제도의 창립·생성과 관련하며 호출된 그의 선택, 즉 큐레이팅 행위들은 외부로 투명하게 돌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질문은 많다. 이제껏 이영철을 다루는 인터뷰와 말들은 이영철이 가진 감각의 홍수, 번뜩이는 재기, 어떤 대범함을 제시하는 “몽타주”였다.[15] 큐레이터 스스로 전시의 방식에서 이 개념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그를 둘러싼 말들 또한 이와 유사한 형태였다. 이때 ‘몽타주’는 이영철에게 중요한 어휘이자 그의 전시 기획 못지않게 그가 쓴 글에서도 발견되는 방식이다.[16]
이영철이 개인일 수 있었던 것, 정확히 말해 제도 안에서 개인이 선언과도 같은 큐레이팅 비전을 제시할 수 있던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선명하게 짚어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집단 중심의 미술 운동, ‘남자 대학 선후배’의 관계망에 온전히 함몰되지 않는 이력을 건너왔다는 사실이다. 그가 민중미술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양축으로 갈린 1980년대 후반 한국미술의 현장에서 집단이나 단체, 혹은 한국의 미술계를 어떤 방식으로든 탈주하는 ‘개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개인’으로서의 문제의식은 그가 어딘가의 소속이 아닌 다른 개인으로 튕겨져 나오고 발화할 때 작동하는 하나의 기제다. 그가 큐레이터의 경험에서 초기 시작점으로 잊지 않고 발언하는 미술비평연구회의 활동이 번역과 연구, 주체적인 글쓰기를 통한 미술 배우기라고 할 때 그는 집단의 스터디 모임을 주동했으나 전시 기획에서는 ‘개인’의 목소리를 강조해왔다. 그가 배치하는 것은 작가의 일생이 아니라 개별 작품 하나하나이며, 이 배치된 ‘몽타주’로서 작품들은 개별적으로 다른 배치도를 그린다. “모든 것을 야구 보듯이 하자”고 썼던 백남준의 말을 인용했던 정헌이 교수의 논문에서 살필 수 있듯 한 사람에게 각별한 문장 하나가 있다면[17] 《당신은 나의 태양》은 2004년 이영철의 선언이자 의제다.
이제 ‘왜’로 들어가 보자. 기관에 소속된 학예실장이나 관장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으로 기획한 전시의 특이성은 ‘왜’라는 문제에서 힘을 발휘한다. 자신이 이니셔티브를 쥐고 시작하는 것으로서 큐레이터는 저자성(authorship)을 갖는다. 큐레이터의 저자성 문제는 클레어 비숍의 ‘큐레이터란 무엇인가’의 글을 통과하기도 하지만, 한국에서 또 다른 주체 설정의 개념으로 논의될 수 있다. 1990년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전시가 기획된 과정과 사립미술관의 형성과 2000년대 이후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독립 큐레이터의 활동, 비엔날레 감독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개관, 국공립 미술관과 서울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 제도는 전시를 생성하는 제도적 형태를 만들어낸다. 국립현대미술관 등의 기관이 아시아와 관객의 공공성을 대의로 표방하며 세부 전시들을 조율해 나갈 때, 서울문화재단으로부터 할당된 기금을 받는 개인은 서울의 어느 지역, 세대, 해당 연도에 행정 절차와 결산을 마쳐야 하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제약조건과 울타리를 넘지 않는 실험 등을 제출, 보고, 완료해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전시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이영철은 다른 전시들을 걸어 다니며 ‘보고’ 쓴다. 2002년 제 4회 광주비엔날레를 다루는 잡지 투고에서는 광주비엔날레뿐 아니라 동시대 비엔날레의 정체성에 대해 자신의 논점을 제기한다. 이 글은 이십 년 남짓의 시간이 올라탄 글이지만 그가 가진 개인의 던져진 방식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기에 다시 건져 올려질 필요가 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비엔날레는 “하이퍼텍스트의 장”이다. 그 이유는 “맥락, 정체성, 이데올로기라는 세 가지 신화에서 벗어나” “고리로 연결된 일련의 큰 덩어리(chunk)”를 구성하기 때문이다.[18] 비엔날레라는 대규모의 국제적 틀을 갖춘 미술제도, 광주비엔날레의 초대 감독이기도 했던 그는 이 글에서도 혼자 서 있는 듯한 개인을 글 끝에 등장시킨다. 조선시대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윤선도의 보길도행을 기억하는 것이다. 윤선도가 지은 「어부사시사」를 “겨울 노래 한 토막”으로 던지며 거대한 구조의 파도 속에서, 덩어리에 묻히지 않는 한 개인의 뒷모습을 칭한다.[19] 큐레이터의 저자성은 거대한 제도와 한 명의 개인이라는 존재, 그 존재의 고립되어 보이는 듯한 선택을 배치시킨다. 이때 개인은 내던져진 자이다.
“모든 회화는 그것이 구상적 형태를 띠고 있어도 근저에서 추상(에너지 기계)이다. 우리의 정신이 뇌(개념 작용)의 정보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지과학의 가설은 의심스럽다. 우리의 뇌는 시냅스의 연관 장치이다. 여기서 정신은 프로그래밍 된 것이 아니라, 통합되지 않고 무형식적인 복수적(複數的) 세계의 복판에 던져져있는 어떤 것이다. 뇌는 신체의 연장(延長)이다. 하랄트 제만이 토로한 것처럼, 생각하기를 보완하고 수정해주는 것은 걷기이다.”[20]
“여러 장면들이 골조가 되게 했다”는 《당신은 나의 태양》의 도록에 실린 큐레이터의 의도는 해당 책에 대한 해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전시장에 활동 시간대가 다른 가운데 생성된 작업, 끊기는 스토리텔링으로서 스토리텔링을 거부하는 어떤 한국 현대미술사의 단편들이다. 《당신은 나의 태양》이 가진 특성은 2003년 3월 그가 쓴 ‘회화’에 관한 글의 서술 구조와도 일맥상통한다. 이 글에서 그는 해외 작가들만을 그가 생각하는 ‘새로운 회화’의 예시로 들고 있는데 글 끝 무렵에 이르러 「특성 없는 남자」를 쓴 소설가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의 통찰과 제만의 ‘걷기’를 다소 뜬금없이 등장시킨다. 이 갑작스러움, 혹은 점프는 그의 수많은 별자리 상자에 들어있는 울고 웃는 단서들의 짧은 등장인 셈이다. 전시를 포함한 미술제도 또한 위에 인용된 이영철의 표현과 같이 ‘복수적 세계의 복판에 던져져 있는 어떤 것’으로 판단했던 것일까. 방대한 제도(세계)는 개인으로 이어지고 이 개인의 뒷모습은 계속 걷고 있다.
한편 제만 방식의 전시 만들기의 저자성과, 국가, 행정, 시의 제도가 관여하는 비엔날레, 도시 관련 미술제도 안에서 이영철이 지닌 저자성은 다르다.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정도로 이영철의 전시기획의 저자성이 갖는 방향성을 제시해 보겠다. 첫째, “세계의 복판에 던져져 있는 어떤 것”으로서 그의 전시는 주제가 아닌 전시라는 시공간 안에서 나름의 주기를 갖고 움직이는 “이미지 생태 현상”을 만들고자 한다.[21] 세계는 미술 제도인 동시에 여러 현실, 과거, 미래들이 폭주하는 리얼리티다. 또한 이때 ‘어떤 것’은 큐레이터이자 감독인 어떤 ‘개인’이 될 수 있다. 둘째, 한국 현실(독재와 군사주의가 영향을 미친 1980년대까지의 역사)에서의 개인이 집단이나 제도와 맺는 관계를 고려할 때 자신의 할아버지를 다루는 제만의 전시와, 이영철의 《당신은 나의 태양》은 흥미로운 대조표를 그리게 한다.[22] 전자가 실제 개인을 호출한다면 후자의 개인은 복수다. 제만의 할아버지가 헝가리 이민자 출신의 이발사라는 특정한 인물이라면 이영철이 다루는 개인은 보다 더 추상적이고 개념적이며, 실제 삶을 이어나가는 한국에서의 집단화된 개인과는 다른 것이다.
3. “명명법과 장르 형성(Nomenclature and Genre Formation)”[23]
한국미술사/현장, 그리고 개인의 ‘비엔날레’
이제 정리해보자. 2004년의 《당신은 나의 태양》은 어떤 개인의 야심을 불러내는가? 개인은 어디부터 어느 시간대까지를 바라보고 말할 수 있으며, 한 세대는 다른 세대를, 또 다른 성별을, 더 다른 이슈들을 어떻게 범주화할 수 있는가. 《당신은 나의 태양》의 ‘왜’는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당신은 나의 태양》을 그 표면과 내부로 분류해 보았을 때 무엇이 어떻게 다르게 보일지 궁금했다. 하나의 전시 형식으로 보았을 때 전시는 새로운 명명법이 있어야만 정확한 분별이 가능해지지는 않을까. 전시를 만든 이들은 (복합적 텍스트의 장이라는 점에서) 개인이 만든 비엔날레이면서 한국 미술 역사의 불가능한 묶음 또한 상상한다. 이 전시는 도록에 실려 있듯, 또 전시의 디스플레이에서 자료와 목소리가 드러나듯 ‘아카이브’가 중요한 전시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자료를 탈맥락화 한다는 점에서 비-기념비적이며, 오히려 역사 쓰기에 구멍을 내는 새로운 시점의 형성이라는 점에서 논쟁적이다.[24] 한국미술사 전시라고 하기에도, 아카이브 전시라 하기에도, 비엔날레라 하기에도, 불가능한 지점들이 있는 전시다.
리사 그린버그의 글 「미로로서의 전시: 새로운 장르(The Labyrinthine Exhibition: A New Genre)」가 전시의 형식을 바라보는 하나의 틀을 제공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이영철의 전시가 ‘미로형’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전시의 ‘명명법’에 대한 그린버그의 해당 글에서 흐름을 살펴보면서 전시 형식의 복합성을 살피고자 한다. 그린버그는 전시를 유형화하는 기존 방식이 개인전과 그룹전, 상설전으로 구분하거나 기획전, 매체, 사조, 주제 등을 분류 기준으로 삼는다고 쓰며, 예외적이고 새로운 방식을 추구한 전시를 포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관습적 분류가 가진 한계를 말한다. 그는 ‘미로형 전시’를 세 가지로 범주화한다. 1930년대부터 1960년대 사이의 초현실주의 전시가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암스테르담의 스테델릭 미술관에서 열린 1950~60년대의 상황주의 인터내셔널과 누보 레알리즘 전시다. 세 번째는 제3회 파리 비엔날레를 위해 ‘시각예술 연구 그룹’이 기획한 《미로(Labyrinth)》 전이다.[25] 그린버그에 따르면 ‘미로형’을 개념화하는 것부터가 중요하다. ‘미로’의 정의가 복잡한 통로나 여정, 얽히고설킨 공간의 총합으로 정의되는 반면 ‘미로형’은 물리적인 공간뿐 아니라 무정형의 구조, 추상적인 감정이나 경험의 교란(disorientation)을 포함하는 것이다. ‘미로형’이라는 전시의 분류를 통해 그는 명료한 목표를 설정하여 결과를 하나의 제안으로서 내보이는 전시 모델과 대비되는, “대립적이고 혼란스러운 면모”를 부각하는 전시의 생성을 가리킨다.
이영철이 큐레이팅 한 것은 전시이기만 했을까? 공간이었는가? 아니면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한 모국어와 보편어 사이의 이중 선언을 필요로 하는, 한국의(아시아의) 비엔날레 제도였는가? 하나의 질문을 남기자면, 그가 던졌던 수많은 공들이 도달한 곳은 어디였는가 하는 점이다. 이영철이 전시 기획을 통해 다루었던 것들, 그것은 한국 현대 미술 현장에서 큐레이터라는 제도와 존재 방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다. ‘그것’이 아니라 ‘그’라고 해야 할까?